넷플릭스에 새로 등록된 산드라 블록 주연의 스릴러 생존물. 산드라 블록보다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재와 연출을 맡은 수잔 비에르에게 관심이 갔다. 폭력과 복수에 인간으로서 대응하는 방법에 대해 잔잔하지만 힘 있게 풀어내서 인상이 깊었던 <인 어 베러 월드>의 연출자였기 때문. 수잔 비에르의 다른 영화를 보지 않았고 <버드 박스>는 원작 소설이 있어 비교적 제약적일 것 같기는 했지만, 삶에 대한 어떤 식의 통찰을 보여줄지 기대 됐다.

떨리는 손으로 두 아이와 자신의 눈을 가리고 어디론가 급히 떠나는 맬러리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절대 눈을 뜨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모습에 이어지는 장면은 이야기의 시작이 되었을 5년 전의 맬러리와 여동생. 홀몸으로 뱃속의 아이를 감당하게 된 맬러리는 아이에게도, 아이와 함께 살아야 할 앞으로의 인생에도 큰 애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를 걱정하는 여동생과 병원을 다녀오는 길, 먼 곳의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뉴스 속 이상행동자들이 그들 앞에 나타난다. 그들의 이상 행동은 어디서 시작 된 건지 무슨 이유에선지 알 수 없지만 발병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즉시 죽음을 택한다.

누구도 진실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니 초자연적 해석만이 남았을 뿐. 남들보다 운이 좋아 살아 남은 사람들은 악령이 개입된 인류의 종말이라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사태를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계속 생존하기 위한 규칙들을 하나 둘 발견해 간다. 가장 중요한 규칙은 건물 외부에 노출된 상태에서 눈을 뜨면 안 된다는 것. 서로를 도우며 살아 남은 사람들은 실내에 틀어박혀 모든 외부의 빛을 차단하고 안전한 요새를 만들어 나간다. 그러는 사이 맬러리의 출산도 점점 가까워 온다.

주목할 만한 단서는 보이지 않는 위험을 새들이 감지할 수 있다는 것. 맬러리가 발견한 새들은 갇혀 있는 덕에 살아 남았지만, 새장 밖의 위험이 다가오면 분명하게 알아채 온 힘을 다해 소리친다. 새들은 안전한 실내에서 바깥의 위험에 두려워하는 생존자들과도 닮았다. 새장 안에 갇혀서는 본연의 새의 생을 살 수 없듯이, 진정으로 살기 위해서는 안전한 곳을 떠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매일의 생존에만 몰두한 맬러리는 잃을 것에 대해 정을 주려 하지 않고, 희망을 가질 수 없을 때 꿈꾸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존 이상의 삶에 의미를 두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맬러리는 커다란 변화를 보여준다.

<버드 박스>는 기이한 현상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정작 원인과 해결책은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많은 어려움이 그렇듯 이유도 답도 알 수 없는 위협일 뿐이다. 영화에서 더 많은 공을 들여 보여주는 건 위협에 대처하는 맬러리와 톰, 올림피아, 더글라스의 태도다. 외부와의 접촉을 모두 위험하게 여기는 폐쇄적인 더글라스에 반해 올림피아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일처럼 공감하고 돕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자기 방어가 강하고 현실을 냉정하게 보는 맬러리에 반해, 톰은 따뜻하게 타인을 배려하고 각박한 상황에서도 밝은 면을 찾아낸다.

극찬할 만한 플롯도, 속 시원한 액션도, 심장 떨리게 하는 긴장감도 없다는 건, 이 영화가 호기심을 자극한 포인트를 고려하면 실망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다른 생존자들, 특히 톰에게 영향을 받으며 변화하는 맬러리를 보는 건, 영화의 말미에 미소 짓는 그녀의 옛 지인과 공감하게 한다. 공포를 예상하고 보기 시작했는데 왜인지 모를 안도감과 따뜻함을 느끼며 끝을 보게 됐다. 산드라 블록의 더 부자연스러워진 얼굴은 별 수 없이 불편했지만, 그녀의 연기만큼은 역시 적잖은 여운을 남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