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에 관심을 가진 나로선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와 함께 3대 SF 판타지 소설이라 불리는 <어스시>의 저자 어슐러 K. 르 귄은 직접 읽어보지 못했어도 그 이름만으로 왠지 모를 두근거림이 있다. SF 소설 중에서도 다양하게 분류가 가능하고 경우에 따라 아이작 아시모프, 필립 K. 딕 등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기도 하고, 몇 대 거장 혹은 몇 대 명작 따위의 손꼽기가 절대적이진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여러 설문에서 수 차례 언급되는 작가와 작품은 팬들에게 있어 폭넓은 동경의 대상일 수밖에 없을 터. 20세기 최고의 SF 소설에 줄곧 이름을 올리는 <어둠의 왼손>은 르 귄 작품 중에서도 가장 궁금했던 이야기다.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와 같은 SF 판타지 소설들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들은 독특한 캐릭터와 그들의 흥미진진한 모험이다. 대서사시라 할 만한 규모와 둘째 가라면 서러울 역동성을 자랑하는 서사가 중심이 되어, 색다른 모습으로 묘사되는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들고 푹 몰입되게 만든다. 르 귄의 <어스시> 시리즈도 마법과 드래곤이 등장하는 대서사시라고는 알고 있지만, 이번에 읽은 <어둠의 왼손>만 볼 때엔 그의 작품은 다른 작가의 작품들보다 더 미시적인 관계 중심적이다. <어둠의 왼손>에서 느껴지는 철학적인 이미지는 기대했던 것과 다르다는 점에서 색다르게 느껴졌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을 느끼게 했던 다른 SF 판타지 소설들과 달리 내가 사는 세계에 대한 시각을 돌이키게 한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지구의 겐리 아이는 인류의 연합을 위한 에큐멘의 특사로서 게센 행성의 국가 카르히데에 방문한다. 하나의 제국의 성격을 띠는 게센의 체계 상, 모국가인 카르히데의 협력이 게센 전체를 연합에 동조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 하지만 겐리 아이에게 도움을 주고 있던 카르히데의 수상 에스트라벤이 왕의 신임을 잃으며 추방당하자 계획이 어그러지고 만다. 에스트라벤이 추방당하기 전 남겼던 경고에 따라, 겐리 아이는 또 다른 국가인 오르고레인으로 달아나고 이곳에서 다시 자신의 임무를 재건하기 시작한다. 연합을 도모하기 위한 하나의 여정으로, 서사시의 특성은 이 작품에서도 주요한 부분이지만 더욱 중심이 되고 두드러지게 묘사되는 건 닮은 듯 전혀 다른 신체적, 문화적 특성을 지닌 지구인과 게센인의 차이와 교류다.
이 작품이 호평을 받아온 데에는 게센 행성과 이곳에 사는 게센인들의 특성, 그리고 게센인들과 지구인 겐리 아이의 교감의 과정 때문일 것이다. 게센 행성은 우리가 겨울이라 부르는 곳으로, 눈의 종류도 다양하고 눈을 의미하는 단어도 무척 많다. 게센인들의 가장 큰 특징은 특정 시기에만 성역할과 기능이 발현된다는 것인데, 그마저도 양성 중 한 가지로 때에 따라 다르게 결정된다. 소위 발정기라 할 만한 이 시기를 이들은 '케메르 상태'에 있다고 말하며, 언제나 케메르 상태인 인간의 신체적 특징을 저급하게 보기도 한다. 반대로 겐리 아이의 눈에도 이 양성인들의 신체 구조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너무나도 다른 두 인류의 보고서와 독백으로 구성된 전체 이야기는 마치 문화인류학 전문서적을 보는 기분이 들 정도로 서로에 대한 관심과 이해에 대한 노력으로 가득하다.
SF의 이름으로, 우리가 들어본 적 없는 독특한 신체 조건과 문화를 가진 이들에 대해 상상한 것이지만, 서로 다른 이를 관찰하고 이해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 설득하려 애쓴다는 점에서 비SF 소설을 읽는 느낌도 든다. 르 귄의 <어둠의 왼손>은 일부 배경조건을 흥미진진한 SF 판타지의 특징으로 그렸을 뿐, 여느 인문학 서적보다 심오하다. 연합과 통치에 관한 정치적 관계, 개개인의 우정과 사랑의 관계가 어느 하나 소홀하지 않게 다뤄진다. 이 두 관계에서 모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신의와 결단인데, 읽는 내내 비단 게센과 에큐멘 혹은 게센인과 지구인 사이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란 확신이 들었다. 게센인이 굳이 먼 곳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상상의 대상이 아닌, 나와 다른 누군가라고 보아도 그럴싸하지 않을까. 르 귄이 왜 언제나 칭송받는지 납득이 간다.
"말해주십시오, 겐리.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무엇이 확실하며 무엇이 예견 가능하고 무엇을 피할 수 없습니까? 당신이 당신의 미래에 대해, 그리고 제 미래에 대해 알고 있는 가장 확실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는 죽는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대답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겐리.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인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영원히 우리를 괴롭히는 불확실성,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무지'입니다." (113쪽)
티베는 보다 더 확실한 무엇, 사람들을 국가로 만드는 확실하고 빠르고 영구불변한 방법인 '전쟁'을 추구했다. 티베의 방식은 치밀하지는 않았지만 꽤 그럴듯해 보였다. 사람들을 빠르게 전체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다른 방법은 '새로운 종교'뿐이었다. 둘 중 어느 쪽도 쉽지 않았고, 그래서 티베는 전쟁을 택하기로 한 것 같았다. (154쪽)
에스트라벤은 신중하게 덧붙여 말했다. "나쁜 정부를 미워하지 않는 이는 바보입니다. 만일 이 지상에 정말로 좋은 정부가 있다면, 그러한 정부에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큰 기쁨이 되겠지요." (29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