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코 이야기하건대 로맨스 영화를 과거에도 꽤 보았고 앞으로도 분명히 보게 되겠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는 전무후무한 로맨스 영화로 나에게는 기억될 것이다. 각 국에서 다양한 영화가 상영될 때 로맨스 영화는 가장 보편적이고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 수 있는 소재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영화지만 그만큼 너무 다양한 소재를 통한 내용이 나와 있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뻔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위험이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지속적으로 나올 영화 장르이다.
로맨스 영화는 단순하다. 두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게 되는 거다. 만나는 과정과 사랑을 가꿔나가는 과정, 그러면서 갈등하거나 잠시 헤어지는 장면등으로 나오지만 거의 대부분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유일하게 불치병에 걸리면 새드엔딩으로 끝나는 영화가 로맨스 영화의 큰 뼈대이다. 이 안에서 얼마나 관객들의 호응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가가 핵심이다.
영화 중에는 보면서 좋다고 하는 영화가 있고 보고 나서 좋다고 하는 영화가 있고 한참을 지나도 생각이 나는 영화가 있다. 나에게 '8월의 크리스마스'는 시간이 지나도 생각이 나는 영화다. 어지간해서 2번 이상 보는 영화가 극히 드문데 '8월의 크리스마스'는 볼 기회가 있으면 어김없이 꼭 본 영화다. 무엇하나 군더더기가 없는 영화라는 생각도 든다. 내용이나 음악이나 연기나 출연 배우나 화면등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영양가 가득한 영화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특별한 내용이 없다. 오히려 무덤덤하게 관조하는 듯한 자세로 시종일관 별다른 에피소드랄 것도 없는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그런데도, 지루하지 않게 집중해서 보게 된다. 어떻게 이런 에피소드로 장면 장면들이 이어지고 영화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이다. 저 장면은 꼭 없어도 될 것 같은데 하는 편견섞인 장면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런 장면들도 없어 보인다.
암을 갖게 된 한석규가 나온다. 그런데 새로운 연인 심은하가 그 안에 들어온다. 이러면, 뭔가 대단한 사랑이 이뤄질 것 같지만 실제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과 별 다를바 없는 사랑을 한다. 우리들이 실 생활에서 보는 연애는 거의 대부분 '8월의 크리스마스'처럼 특별할 것 없이 일상적으로 소소한 것들로 가득차 있다.
작은 감정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점점 상대방에게 더 깊히 빠지고 상대방이 생각나고 보고 싶고 만나고 싶어지면서 더 자주 만나면서 사랑한다는 감정을 깨닫게(??) 된다.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라 처음 보는 대상에 대한 호기심이 이성이라 감정이 다를 뿐이기도 하다.
비록, 암에 걸렸지만 처음에는 삶에 대한 희망을 놓치 않고 있었으리라 본다. 그러는 와중에 심은하가 미처 깨닫지 못한 순간에 자신의 공간으로 들어 왔고 어느 순간 이미 한석규의 공간(사진관)에서 떠나지 않는 심은하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처지나 상황에 대해 생각할 틈도 없이 들어온 상대방을 받아들였으리라 본다.
물론, 한석규는 늘 수동적인 입장이다. 먼저 심은하를 찾아가거나 만나려고 한 적이 없고 늘 어김없이 심은하가 사진을 현상하기 위해 사진관에 늘 한결같이 있는 한석규에게 찾아오거나 우연히 길에서 만나 아주 짧은 시간을 공유할 뿐이다. 그럼에도 점점 쌓이는 둘의 감정은 결국 데이트로 이어지고 한석규는 잠시 이 사랑이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갖지 않았을까 한다.
정확하게 묘사되지는 않지만 둘의 나이차는 10년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한석규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심은하를 받아들였고 어떤 응석을 부려도 받아주는 한석규를 심은하는 좋아했을 것이다. 둘의 사랑은 결국 한석규가 더이상 자신의 삶이 이어질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인 후에 포기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의도하지 않게 심은하와 만남이 깨졌지만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심은하를 만나고 싶어 찾아 갔으나 결국에는 심은하를 직접 보지 않고 먼 발치에서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한석규의 애절함이 화면에 잘 묘사되어 있다. 잡고 싶지만 잡을 수 없는 사실이 더욱 절망적이지 않았을까 한다. 그래도 당신을 잊지 않았다는 점을 심은하에게 남기고 떠난다.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고 좋아하는 감정을 넘어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닫게 된 심은하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한석규에 대해 원망을 하게 되지만 분명히 한석규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사진관이 계속 운영이 되었고 자신의 사진이 걸려 있는 걸 보면서 굳이 물어보지 않았어도 깨닫게 되었을 것이고 이를 알아 심은하는 한석규가 영화 대사로 나온 "내 기억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채 떠날수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처럼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정확하게 한석규의 상태가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도 자신에게 추억을 준 상대에게 시간이 지나 웃을 수 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나고 나면 어떤 추억이든 웃을 수 있는 게 바로 추억이라는 이름의 기억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어떤 응석을 부려도 다 받아주던 한석규의 부재는 더더욱 어쩌면 지금의 자신과 비교해서 더 웃을 수 있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상영할 당시에 귀신이 추억하는 영화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었다. 이 영화에서 한석규의 나래이션이 있는데 죽은 사람이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 내용 중에서도 귀신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늘 꾹꾹 자신의 감정을 눌러오고 살았던 한석규는 그나마 술기운을 빌려 자신의 속 마음을 폭발시키기도 했지만 역시 심은하와 있을 때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을 마지막으로 간직하며 웃으면서 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꼭 그것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본인의 영정사진을 찍으면서 무표정에서 마지막에 살짝 웃으면서 찍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싶다.
거창하고 지고지순한 사랑이나 대단한 애달픈 사랑이 나오지도 않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는 시종일관 담담하게 자신의 상황을 지켜보고 상대방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려져있다. 이 영화가 나올 시점부터 우리나라 영화에서 일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가 나왔다. 영화라는 장르가 무엇인가 일상에서 벌어지지 않는 일이나 좀 더 과장된 장면들이 나왔다면 이제는 우리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서서히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내가 한석규였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아마도, 한석규처럼 행동햇을 것 같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사귀지만 결국 자신의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말 없이 보내주는 것이 상대방을 위한 행동이고 본인도 즐겁게 마지막을 보낼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며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한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늘 내 마음속에 남아있던 영화였는데 그 이유가 어쩌면 평소의 나랑 비슷한 걸 많이 봐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석규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데, 우리나라의 많은 남자들이 한석규 같은 것이고 많은 여자들이 심은하 같을 것이다.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만나던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 많아지면서 사랑을 하게 되는.
앞으로 언제 또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나에게는 가슴에 남아 기억될 것이다. 영화 대사처럼 나에게 추억이라는 선물을 선사한 당신을 잊지 않고 간직할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