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의 여인이 다짐하던 복수의 아리아
푸치니의 <나비 부인> 중 ‘어느 갠 날’과 영화 <위험한 정사>
비디오테이프로 영화를 보는 것이 한창인 때가 있었다. 그때 우리 동네의 한 비디오 가게 아저씨는 신혼으로 보이는 젊은 부부가 비디오를 빌리러 오면 꼭 애드리안 라인 감독의 1987년 작 <위험한 정사>를 권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한 여자와의 하룻밤 사랑이 빚은 무시무시한 비극을 다룬 <위험한 정사>를 왜 하필 한창 사랑으로 가득한 젊은 부부에게 권하는지 의아하기도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나름대로 이 새내기 부부의 앞날을 위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아저씨의 의도가 애교스럽기도 하고……. 불륜의 위험이라든지, 가정의 소중함이라든지, 뭐 그런 이야기를 아저씨는 나름대로 하고 싶었던 것일 테니까.
라인 감독은 <나인 하프 위크>, <야곱의 사다리>, <은밀한 유혹>, <플래시 댄스> 등의 작품들을 통해 남녀의 타오르는 성적 욕구와 함께 인간의 깊은 내면을 감각적으로 그리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 그가 다시 메가폰을 잡은 작품이니 <위험한 정사>는 매력적인 아내와 귀여운 아이를 둔 출판사 변호사 댄이 어느 날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독신 여성 알렉스의 요염한 매력에 이끌려 하룻밤 불륜에 빠져드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영화 <위험한 정사>
하룻밤의 유희였던 댄은 알렉스가 자고 있을 때 메모만 남겨두고 떠나고, 그럴 수가 없었던 알렉스는 임신 사실을 고백하며 반 위협, 반 애워조로 집요하게 매달린다. 댄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그는 어떻게든 알렉스를 떼어놓으려 하고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 매달린다. 그녀는 댄의 아이를 유괴하기도 하고, 댄의 가정에 침입하여 댄의 아내 베쓰와 싸움을 벌인다. 결국, 알렉스의 집착은 죽음으로 막이 내린다.
불륜을 하룻밤 사랑 정도로 가볍게 치부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야말로 섬뜩하기 짝이 없는 영화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 톰 행크스가 이 영화를 본 이후 ‘낯선 여자와 딴짓’ 같은 것은 안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영화이기도 하다. 남성들 입장에서는 그래서 입맛(?)이 좀 쓴 영화일 것이다.
이 영화를 통해 라인 감독은 한 남자의 외도를 그린 단순한 스토리에 독특한 서스펜스와 치밀한 구성으로 접목하여 스릴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이클 더글라스와 글렌 클로즈의 연기도 대단했지만, 무엇보다도 시나리오의 독특함과 치밀함이 없었더라면 스릴러로서의 완벽함을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의 삶이 희로애락으로 규정지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사랑할 때 단순히 사랑할 때의 기쁨이나 헤어질 때의 슬픔으로 나뉠까? 나는 모든 사람이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의 아주 섬세한 공포를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라인 감독은 평소 이를 자주 어필했는데, 그의 생각대로 <위험한 정사>는 아주 잘 표현된 ‘섬세한 공포’라고 하겠다.
재미있는 건, 이 무서운 영화의 주인공 알렉스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 푸치니의 오페레 <나비 부인>이라는 것이다. 특히 댄과 근사한 하룻밤을 보낸 뒤 정답게 스파게티를 만들 때, 그리고 그가 떠나고 난 뒤 그 상실감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방바닥에 주저앉아 등잔불을 껐다 켰다 할 때 흐르던 곡이 눈길을 끈다.
그만큼 알렉스의 행복과 슬픔까지도 함께 나누던 곡인데, 그것이 바로 <나비 부인> 중의 유명한 아리아 ‘어느 갠 날’이다. 질투에 불타는 복수심을 망연자실한 표정 속에 숨기고 있는 알렉스, 그녀와 하나가 된 글렌 클로즈의 표정 연기가 그야말로 대단히 돋보이는 장면이다.
푸치니의 중기 대표작인 <나비 부인>은 1887년경의 일본 나가사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집을 무대로, 미군의 해군 장교 핑커톤과 일본 기녀 나비 부인의 결혼부터 핑커톤의 배신과 이에 절망한 나비 부인의 비극적 자살까지를 엮은 오페라다. 중국을 소재로 한 그의 <투란도트>와 함께 동양적 소재의 대표적 오페라로 꼽히는 <나비 부인>. 그 속의 ‘어느 갠 날’은 돌아오지 않는 핑커톤을 그리며 그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여자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는 절절한 선율의 아리아다.
오페라 <나비부인> 이별하던 그 날에 사랑하는 그이는 내게 말했다오, 오, 버터플라이 그대가 기다리면 내 꼭 돌아오리라 어느 갠 날, 바닷물 저편에 연기 뿜으며 흰 기선 나타나고 늠름한 내 사랑 돌아오리라 하지만 마중은 안 나갈 테요 나 홀로 그 임 오기 기다릴 테요 사랑은 이 언덕에서 맞을 테요 그대는 부르겠지, 버터플라이 그러나 나는 대답 않고 숨겠어요 너무 기뻐서 죽을지도 몰라요 내 사랑이여, 내 임이여! 그대는 반드시 돌아오리 사랑하는 이를 손꼽아 기다리는 마음을 이토록 서정적이고 애절하게 표현한 노래가 또 있을까. 그러나 결국 그 사랑은 다른 여성과 함께 나타났고, 홀로 그와의 사랑 결실인 아이까지 낳아 기르던 나비 부인은 충격을 받은 나머지 단도로 배를 찔러 자결하고 만다. 알렉스가 집착한 사랑의 배경으로, 이 가슴 절절한 아리아가 흐르는 것은 그래서 충분히 설득 적이다. 복수를 ‘자살’로 택했느냐, ‘응징’으로 택했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느 갠 날’은 사랑의 추억과 기다림이 절절히 담겨 있는 청아한 사랑의 아리아다. 영화 속 알렉스 때문에 너무 무서워하지 말길 바란다. 그리고 불륜의 유혹에 빠진다면 벌떡 일어나던 피투성이의 알렉스를 한 번쯤 떠올려보기 바란다. 그런 점에서 그때 우리 동네 비디오 가게 아저씨는 참 현명한 사람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