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옹기 속 묵은 곡식이 똑 떨어지고 보리는 채 여물지 않아 식구대로 배고픔을 견뎌야 했던 춘궁기를 보릿고개라 했다. 이제 그 시절은 ‘그런 적도 있었지’ 하며 이해도, 공감도 못할 손자 앞에서 무용담을 늘어놓는 할아버지의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다. 그렇게 보리는 배고프고 헐벗었던 시절의 상징이 되었다. 하도 보리밥을 질리게 먹어 갓 지은 쌀밥만 고집한다는 이의 이야기도 있다. 놀라운 경제 성장을 하던 와중에는 국민들이 쌀만 편식한다며 쌀을 아끼기 위해 보리를 섞는 혼분식을 강제로 시행한 일도 있었다. 2010년 지금, 보리의 위상은 어떤가. 건강을 위해 멀리까지 부러 찾아가 먹는 별미가 되었으니 격세지감이란 말이 딱이지 싶다. 화려한 보리의 부활이기도 하고 말이다.
보리는 체력을 키우고 힘을 주는 효능이 있다. 로마의 검투사들은 시합을 앞두고 보리를 먹었고 사람들은 그들을 홀디어리(Hordearii, 보리를 먹는 사람들)라 불렀단다. 쌀, 감자와 더불어 탄수화물이 풍부한 보리는 우리 몸에 중요한 에너지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질병을 예방하는 약으로 쓰이기도 한다. 보리가 가진 베타 글루콘은 심장병의 위험을 감소시킨다고 알려졌고 나쁜 콜레스테롤인 LDL 생산도 억제해 동맥경화도 예방한다. 암과 소화 장애 예방, 변비 해소에도 좋으니 현대인들이 두려워하는 각종 질병으로부터 우리 몸을 지키는 수호천사라 하겠다. 한때 보리가 등한시된 이유는 밀의 등장 때문이었다. 빵과 과자, 시리얼 등 가공이 쉬운 밀은 빠른 속도로 식탁을 점령하기 시작했지만, 여러 실험 결과에 따르면 보리에 비해 앞서 이야기한 효과들을 기대할 순 없었다.
보리는 열매 껍질이 씨에서 잘 떨어지지 않으면 겉보리(껍질보리, 광맥), 쉽게 떨어지면 쌀보리로 나뉜다. 열매에 난 줄로 두줄보리, 여섯줄보리 등으로도 구분하기도 한다. 보리에는 탄수화물 외에 단백질, 비타민 B군, 섬유질, 전분, 무기질 등이 함유되어 있는데 맛은 달고 짜며 성질은 서늘하거나 약간 따뜻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밥으로 지어 먹는 방법이 가장 흔하나 차로 끓여 마시고 빵, 국수, 미숫가루 등으로 가공하기도 한다. 식혜나 고추장, 맥주 등은 질 좋은 보리를 맥아(보리 낟알을 싹틔워 말린 것)로 만들어 가공한 음식이다. 가장 대표적인 보리 음식은 보리밥. 열무김치를 송송 썰어 고추장 한 숟가락을 넣고 비벼 먹어도 좋고, 온갖 나물을 넣어 고추장 없이 비벼도 일품이다. 보글보글 끓는 강된장과의 궁합은 최고라 하겠다. 보리밥은 실컷 먹고 돌아서도 배가 금방 꺼진다 하고, 또 방귀가 나와 꺼리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쌀보다 섬유소가 많아 빨리 장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소화가 덜된 상태로 장까지 가다 보니 발효 가스가 많이 생성된다는 것. 요즘 사람들에게 부족한 섬유소가 많다니 작은 것을 얻기 위해 크고 중요한 것을 놓치진 말자.
이른 봄, 시골에 가면 보리밭을 발로 꾹꾹 밟는 모습을 보게 된다. 들뜬 흙을 눌러줘 보리 뿌리가 잘 내리도록 하는 보리밟기다. 행여 가족이 배곯을까 걱정하며 발에 힘을 넣던 그 옛날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은 아니더라도, 올봄 가족 건강을 위해 보리 음식에 도전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