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로호 선착장을 향하는 길은 참 삭막했다. 시멘트를 대충대충 발라놓은 것 같은 길은 그런 면모를 더욱 증가시킬 뿐이었다. 다만 높다란 언덕 아래에 부교 하나 띄워놓고 둥실둥실 떠서 승객을 기다리는 물빛누리호와 안개 덕에 아스라하게 펼쳐지는 풍경이 선착장의 살풍경함을 조금 희석시킬 뿐이었다. 가파른 경사에 온 신경을 쓰면서 내려오다 산천어가 어항에 들어있는 것을 보곤 얼른 그쪽으로 향했다. 오로지 달랑 하나 있는 가건물에 있는 식당에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녀석들이었다. 자신들의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좀 무섭다 싶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기에 속으로 반갑게 마주 인사를 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없다는데 아무래도 산천어의 방그레 웃는 얼굴은 정면으로 보기에는 조금 인상이 너무 강했다. 어설프게 인사를 하고는 식당을 지나치자 본격적으로 선착장으로 이어진 계단이었다. 여기저기 깨지고 이가 빠져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내려가다간 덜커덕 미끄러지기 십상인 계단을 조심스럽게 밟고, 흙먼지 이는 땅 두어 걸음을 내딛고 마지막으로 부교를 올라서고야 비로소 온전히 파로호의 멋이 좀 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

흐린 날씨는 좀 흠일 것도 같은데 그 덕에 한 폭의 동양화 같은 분위기인지라 썩 나쁘지는 않다. 잔물결조차도 일지 않는 고요한 호숫가에 부평초마냥 떠 있는 건물 한 채와 마치 병풍인양 펼쳐진 야트막한 산은 차라리 그림이었고, 그래서 어쩌면 좀 부연 듯한 안내가 더 어울렸는지도 모르겠다. 배 난간에 턱을 괴고 서서 멍청히 호수만 쳐다보고 있다 보니 출항하는지도 몰랐는가보다. 부드럽게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던 배가 선회하여 선착장을 보여주고 나서야 배가 선착장에서 멀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물결조차 일지 않던 파로호에 일대 파란이 일었다. 물빛누리호가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자 그 평화가 깨어진 것이었다. 망설임도 없이 물살을 가르며 가는 여객선을 따라 인공으로 조성된 호수에 의해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박제된 인공의 섬들이 불뚝불뚝 솟아났다. 어떤 것은 거북모양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달팽이모양이기도 하고, 그저 둥그런 것도 있는가 하면, 호수와 만나는 육지가 마치 녹아내린 아이스크림 같은 곳도 있었다.

파로호는 제법 큰 호수이다. 총 면적이 38.9㎢에 이른다. 그래서 육지의 바다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킬 때 대륙을 침략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북한강을 막아 만든 인공호다. 해방 직후에는 북한에 속해 있던 것이 한국전쟁 후 대한민국령으로 귀속되었다. 한국전쟁 화천전투 때 북한과 중국의 연합군 수만을 이곳에 수장하였다고 하여 이승만 전 대통령이 파로호라고 이름 지었다고도 하는 제법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담수어가 풍부한 곳으로서 사랑 받는 곳이라고도 한다.

북한강 상류 평화의 댐에 이르기 전 파로호가 생기며 마을이 물에 잠겨 오지가 된 비수구미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 이름의 어원은 정확하게 전해진 것은 없지만, 구미라는 말이 몽골어로 물이 육지로 둥글게 굽어 들어간 곳이라는 뜻이라고 하여 대략 육지가 물에 둘러싸여 생긴 마을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지어진 게 아닐까 하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휴양지로 각광받는 곳인데 일단 이번 일정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곳으로 스치듯 지나치고 1시간의 운항 끝에 목적지인 평화의 댐 선착장에 정박했다.

북적이는 인파 틈사이로 육지에 발을 딛는다. 조금 경사가 급한 길을 헉헉 거리며 오르자 도착한 곳은 세계평화의 종공원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종들이 전시되어 있는 공원으로 직접 종을 쳐볼 수도 있다. 누군가 힘차게 종을 치자 심장을 울리는 소리가 멀리 퍼져나간다. 동양의 종 특유의 중후함이 담겨져 있다. 서양에서 치는 맑으면서도 높은 소리와 역시 조금 다르다. 자작나무가 심어진 나무데크를 따라 올라가니 군사분계선을 재현해 놓은 공원이다. 탄피자국이 그대로 남은 벽과 빛바랜 흑백사진으로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 지는 기분이다. 아니 조금 비감하기까지 하다.

좀 더 위쪽으로 올라간다. 가파른 계단이 끝나고 널찍한 마당에 서 있는 것은 거대한 염원의 종이다. 목재로 만들어진 종으로 한반도 분단의 현실을 담은 울리지 않는 침묵의 종이기도 하다. 언젠가 이 남북한 통일이 이루어져 염원의 종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조용히 바라는 마음이 알알이 전해지는 종이다.

마침내 평화의 댐에 이르렀다. 북한강의 최북단에 위치한 그야말로 북한과 가장 가까이에 세워진 댐이다. 총길이만 해도 601m, 높이는 125m에 이르고 저장하고 있는 수량이 무려 26억 만 톤이 넘는 엄청난 댐이다. 북한이 북한강 상류에 금강산댐을 만들자, 수공의 위협을 받은 국가에서 대비책으로 만든 댐으로 국민성금 639억 원이 들어간 국민의 댐이기도 하다. 1989년 1차 완공되었던 댐이니만큼 그 성금을 낸 어른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2005년 증축공사가 이루어졌고, 지금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평화의 댐 한 쪽에는 세계평화의 종공원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세계평화의 종이 자리하고 있다. 2009년에 완성된 범종으로 일류의 평화를 염원하는 뜻에서 세계의 분쟁지역에서 보내온 총알과 포탄의 탄피를 녹여 만든 종이다. 신라시대의 범종 형태를 띠고 있으며, 높이가 무려 4.67m에 이른다. 종의 윗부분 장식되어 있는 비둘기 네 마리는 동서남북을 가리키는데 그중 북쪽을 바라보는 비둘기만 날개가 하나 밖에 없다. 남과 북이 통일되는 날에 제작할 것이라고 하여 역시나 통일을 염원하는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 울려 퍼지는 소리 또한 자못 비장하다.

세계평화의 종 바로 옆에 손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있다. 세계 각국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의 손으로 실제 크기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영광스러운 손이니만큼 슬쩍 악수를 청해보는데 어째 맞잡는 것이 좀 요원하다. 역시 쉽게 닿을 수 없는 인사들이기 때문일까.

솔숲 사이로 놓인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비목공원이다. 한국전쟁 때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간 용사들을 기리는 곳이다. 푸른 꿈을 채 펼쳐보지도 못하고 연기 속으로 사라져간 꽃처럼 아름다운 청년들이 묻힌 곳이요, 아직도 잊히지 않고 불리는 가곡 ‘비곡’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 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그들의 넋을 기리고자 비탈에는 한반도 모양의 돌무덤이 생겼고, 애달픈 비목 몇 개가 슬프게 세워져 있다. 아직도 전쟁 당시에 아무렇게나 묻힌 시신을 찾고자 하는 활동은 계속 되고 있다고 한다. 비록 관등성명은 밝혀지지 않더라도 그 시신만이라도 찾아 제대로 잠들 수 있기를 희망한다.

평화는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과거 누군가의 희생을 디딤돌로 삼아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너무나 달콤한 나머지 시간이 지날수록 희생의 무게가 잊히기 쉬운 것도 평화이다. 결국 최근에서 경색된 남북한의 관계는 그런 당연히 기억되어야 할 것들을 잊어버린 우리의 잘못 또한 있는 것은 아닐까. 온통 염원으로 가득한 평화의 공원처럼 하루빨리 한반도에도 평화가 찾아오길 슬며시 바라본다.

참고자료

+ 화천군 관광정보 : http://tour.ihc.go.kr/

+ 네이버 지식백과 : http://100.naver.com/100.nhn?docid=157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