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가을이면 가고 싶은 곳이 있다.

마치 빚 지고 가만 못 있는 사람처럼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 때 쯤이면 어김없이 발길을 하고픈 곳,

바로 경상북도 영주의 부석사이다.

아니 부석사라기보다는 부석사로 향하는 야트막한 오르막길의 정취를 더 그리워하는지 모른다.

빠알간 단풍 그리고 노오랗게 물든 은행나무 등 나무들이 터널을 만들어 내는 길, 부석사엔 이 길이 있어 더더욱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는 건 아닐까..... 

은행나뭇길이 끝나고나면 벚나무길이 시작된다. 역시 왼쪽은 옷을 거의 벗었고 오른쪽은 곱게 물든 나뭇잎들을 아직 달아매고 있었다.

서쪽은 아무래도 일조량이 적은 때문에 낙엽을 빨리 떨구어낸 듯 하다.

당간지주(보물 제255호), 부석사가 세워진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부석사에 들어섰음을 알려준다.

천왕문으로 올라선다. 산자락에 만든 절집이라 부석사의 건축물들은 석축 위에 지어져 있다. 

천왕문 옆으로 너무도 곱게 물든 단풍들이 늦가을의 잔치마당을 펼쳐져 있었다.

한 비탈 더 올라서면 수문장처럼 쌍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이 서 있다. 그 뒤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부석사의 전각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부석사를 품은 가을산은 장구한 세월을 간직한 절집을 한층 더 그윽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범종루, 그런데 종이 아닌 북이 보인다. 고루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봉황산부석사'란 현판이 걸려 있다. 일주문 현판의 태백산부석사가 봉황산부석사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태백산 줄기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는 부석사는 사실은 봉황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왜 굳이 태백산 이름을 쓰고 있는 것일까? 태백산이 가까이 있고 또 '태백'이란 이름 자체가 신령함을 간직하고 있기에 그런게 아닐까.

부석사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는 안양문, 조선 명종 때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선조9년에 중건되었으니 역사가 440년이 넘은 건물이다. 

'안양'이란 불교에서 말하길 '극락', 이 문을 통과하면 극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절이란 곳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도 정진하는 곳이기에 부석사로 들어감은 바로 극락으로 가기 위해 세속을 떨쳐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안양문의 편액은 이제 태백산도 아니고 소백산도 아니고 봉황산도 빼버린 그냥 '부석사'이다.

산의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떠랴, 부석사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절인 것을.

안양문은 들어올 때는 문이지만 안쪽에서는 '안양루'란 이름을 달아맨 누각이다. 무량수전과 함께 부석사의 중심을 이루는 건물이다.

이 안양루에서 내려다보는 소백의 산줄기들의 풍경은 가히 압권이다. 그래서 부석사를 소재로 한 사진은 이 자리에서 찍은 것들이 많다.

너무 절경이라 극락이란 의미의 '안양'으로 이름지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안양루와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는 석등은 국보 제17호로 중요한 보존가치를 지니고 있다. 돌로 만들었기에 안양루에 불이 났어도 끄떡없이 살아남았을 것이다.

석등을 앞에 두고 부석사의 주불전인 무량수전이 서 있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졌었기에 학교 때 국사시험에서 빠지지 않았던 소재이다. 나중에 봉정사 극락전이 최고의 목조건물로 밝혀졌지만 건축의 완성미는 무량수전에 비해 떨어진다고 한다. 고려 때인 13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무량수전은 그 오랜 역사성으로 인해 학생들의 수학여행코스로 인기가 높다.

기와집에서 내가 가장 관심을 갖는 곳은 건물 모서리 부분의 처마, 옛날 목공들의 빼어난 솜씨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무량수전의 동쪽 언덕배기 위엔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안양루는 고려 때 만들어졌지만 역사는 통일신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나라에 유학 갔던 화엄종의 창시자 의상대사가 문무왕의 명에 따라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보물 제249호, 2층의 기단 위에 3층을 쌓은 전형적인 신라 때 건립양식으로 오랜 세월을 견디느라 여기저기 깨어진 부분도 많이 보인다.

이 탑이 있는 곳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정말 아름답다. 낙양루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하기에 낙양루를 함께 눈 안에 담을 수 있다.

아무리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어도 싫증나지 않는 풍경.........절은 역시 산속에 있어야 제격임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부석사는 절 자체보다 절로 오르는 길, 그리고 절에서 내려다보는 소백산맥줄기가 있어 한층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무량수전 위쪽엔 부석사를 창건하고 입적 때까지 머무르며 화엄경을 연구한 의상대사의 초상화를 모신 조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조사당으로 오르는 길은 호젖하다. 연인이 손잡고 오르내리기에 좋은 데이트코스이다.

국보 제19호, 고려 우왕 때(1377년) 지어진 건물이다. 

조사당이란 불교의 선종에서 그 종파를 연 조사를 봉안한 절집을 뜻한다. 화엄종을 의상이 창시했기에 의상대사의 초상화를 모신 것이다.

조사당 안에는 원래 사천왕과 제석천 그리고 범천을 6폭으로 나누어 그린 벽화(국보 제46호)가 있었으나 보존문제로 유리상자에 담아 무량수전 안에 보관하고 있다.

이 조사당 처마 밑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가 나무로 변했다는 일명 '선비화'가 자리하고 있다. 이 또한 훼손될 것을 우려해 철망으로 가둬놓았다.

꼭 철망 안에 가두어야 하는지...

무량수전의 오른쪽엔 커다란 바위가 있다. 바로 '부석'이다. 부석사 이름의 유래는 이 '부석'에서 나왔다. '뜰 부(浮) 돌 석(石)', 뜬 돌이란 뜻의 절이다.

화엄사나 해인사 범어사 등 의상대사가 건립한 다른 절의 이름을 떠올려보면 대사가 경전을 연구하다가 입적까지 한 절의 명성에 비하면 그다지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란 생각이 들게한다. 하지만 바로 이 부석이란 절의 이름에 애틋한 사연이 담겨있다.

그 옛날 당나라로 유학갔던 의상대사는 당 고종이 신라를 침략하려 한다는 소식을 고국에 알리기 위해 귀국하기로 한다. 이 때 의상대사를 남 몰래 흠모했던 '선묘'라는 여인이 사랑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고는 서해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어 귀국길에 오른 의상대사를 보호한다. 무사히 신라로 돌아온 의상대사는 문무왕의 명에 의해 부석사를 창건하려 하는데 그 때 이 곳의 이교도 무리들이 절을 짓지 못하게 방해하자 용이 된 선묘낭자가 절터에 있던 커다란 바위를 공중에 들어올려 내리치려 하자 방해하던 무리들이 놀라 떠났다고 한다.

전설이란 것이 픽션이라고 하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에 바탕을 둔 꾸민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면 이 부석사는 의상대사의 사랑이야기가 담겨있는 곳이 아닐까. 성직자이기에 이루지 못할 사랑의 사연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 절, 부석사는 그런 낭만이 있기에 더 아름답게 보여진다.

부석 아래쪽엔 삼성각이 서 있다. 외국으로부터 전래된 불교가 우리나라의 토착신앙과 접목한 상징이다.

꽤 오래된 듯 보였으나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은 건물이다. 그래서 그런지 단청도 벗겨지고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듯 하다.

타박타박 삼성각 아래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돌아다본 부석사, 층층이 쌓인 석축 위로 바라다보이는 안양루와 무량수전의 지붕이 발길을 잡는다.

이렇게 비탈진 곳에 힘들게 석축을 쌓아 지은 절집이 어디 또 있을까?

이미 자리를 잡은 이교도들을 내쫓으면서까지 의상대사가 꼭 이 곳을 고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신령스런 태백산의 기를 받기 위해서였을까?

바라다볼수록 부석사에는 설화만이 아닌 어떤 사연이 분명히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갖게한다.

그렇게 오고싶었던 부석사, 내려가는 길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날 수 있었다.

지나가던 누군가는 4시간 걸려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그들 또한 부석사를 꼭 눈에 담고 싶어 찾아왔으리라.

겨울의 부석사는 어떤 모습일까? 다가오는 겨울 어느 눈 내리는 날에 다시금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