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개인적으론 철 지난 바다를 좋아한다. 

사람들로 북적댔던 여름이 지나가고 난 뒤의 바다는 맘껏 음미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한라산의 사려니 숲길을 기분좋게 걷고나니 바다가 보고싶어졌다.

그래서 향한 곳은 이호해변, 공항 바로 서쪽에 있는 도두항 바로 옆에 자리한 제주시에서 가장 가까운 해수욕장이다.

어릴 적 집에서 가까운 덕에 자주 들렸던 바다이기도 하다. 

햇님이 서쪽 하늘로 넘어가는 즈음 해변의 언덕배기에 도착했다.

파아란 가을하늘 뭉게구름 아래 나처럼 철 지난 바닷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몇몇 내려다 보였다.

멀리 작은 파도들이 햇빛을 받으며 모래사장을 향해 다가오는 은파의 풍경은 한 폭의 움직이는 그림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오른쪽의 풍경은 바다와는 영 부조화스러웠다.

항로표지는 목마 형태로 만든 듯, 불현듯 트로이의 목마를 떠올리게 한다. 나 참! 이호해변과 목마가 과연 무슨 연관이 있음인지...

그 오른쪽으로 철구조물 또한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무슨 테마공원을 조성한 것 같은데 지난 여름 불었던 태풍 곤파스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바다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공구조물들은 옛날 경치를 떠올렸던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들이다.

눈을 육지 쪽으로 돌리면 사극 드라마 세트장에서 볼 수 있는 옛 건축물들의 모형을 볼 수 있다.

누군가가 많은 돈을 투자해서 조성했다고 하는데.....바람도 많은데다 여름에서 초가을까지 태풍이 많은 제주해변을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닌지?

모래사장으로 내려섰다.

작은 낭떠러지를 가득 메우며 모래밭까지 이어져 내려온 키 작은 나무들이 눈길을 끌어 발길을 이끌었다.

어릴 때부터 바닷가에서 많이 보아왔지만 그냥 스쳐 지났던 것들이 이젠 관심대상이 되었다.(나이 먹었음의 증거이다.)

'순비기 나무'이다.

햇볕이 강한 바닷가에서만 자라며 아무리 키가 커봐야 70cm 이내, 7월부터 9월 사이에 꽃이 핀다.(네이버 검색자료)

아마 바람 많은 바닷가라 바짝 엎드려서 자신을 보호하기 때문인 것 같다. 여름철에 꽃을 피우는 걸 보아 이 나무도 자기를 봐줄 사람들이 언제 많이 오는지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호 해변엔 다른 바다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풍경이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었다. 바다 일부를 돌로 담을 쌓아 놓은 것이다.

이른바 '원담'이다. '원(垣)'이라 함은 조수간만이 큰 곳에서 밀물 때 몰려온 고기떼들을 썰물일 때 자연스레 가둬서 쉽게 잡을 수 있도록 만든 장치로, 이 원을 돌담을 쌓아 만들어 '원담'이라 이른다. 이 원에서 주로 잡았던 어종은 멸치로 알려져 있다. 물론 멸치 말고도 농어 숭어 볼락 등 영문 모르고 들어왔던 좋은 횟감들도 많이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원담은 옛부터 이어져 내려온 어촌공동어로작업장으로 이호동엔 있었던 6개 중 남아 있는 하나로 이름은 모살원(모살은 모래를 뜻함)이다. 

원담을 보면 남해안 지족해협의 죽방렴이 떠오른다. 둘 다 멸치가 주 어종인데, 다만 남해안 죽방은 바다 가운데 설치되고 원담은 바닷가에 이어 설치된 것이 다르다.

 
특별한 곳이기에 사람들은 거의 원담에 모여들어 있었다. 

오래전 허물어졌다가 복원된 이호의 원담은 지금은 고기잡이용은 아니고 관광용이다. 여름철 이 곳에서 벌어지는 '이호태우축제' 때엔 맨손고기잡이체험도 즐길 수 있다.

원담 안엔 또 다른 작은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작은 원담 안에 물은 차디찬 용천수, 곧 저 바다 밑에서 올라오는 민물 지하수이다.

어릴 땐 바다에서 멱 감고 이 용천수에서 몸을 헹구어 냈었다. 얼마나 차가운지 한여름에도 몸이 파르르 떨릴 정도였다. 

발을 담그고 1-2분도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물은 또한 명경처럼 깨끗해 안이 환히 드러나 보인다.

 
 
 
원담 옆으로 이호의 백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다.

떠들썩 했던 여름이 지나간 이 즈음, 파도소리만이 '처얼썩 처얼썩'.......자연의 연주소리가 찾아온 이들을 반겨주고 있었다.